2007/11/08 09:10

맨토 친구에게, 번역책 난독증

내가 시시한 아저씨라고 느낄때가 지하철을 탈때다. 지하철을 타면 나는 빈자리에 집착한다. 앉아 가는 것과 서서 가는 것은 지나고 나면 아무 상관없는 허무한 문제지만, 나는 전철 타는 그 상황에 닥치면 빈자리에 집착한다.

퇴근을 하는데 전철에서 빈자리를 놓쳤다. 왠지 금방 내릴 것 같은 사람 앞에서 책을 읽었는데 다행히 금방 내려주었다.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너도 알다싶이 최근 출퇴근 시간이 길어졌는데, 세상 살아남고 싶으면 이 기나긴 출퇴근 시간을 잘 활용할 필요가 생겼다.

야심찬 내 계획을 보아라~ 출근 시간때는 영어 공부를 하고, 퇴근 시간때는 기술 서적을 보기로 했다.  

나의 계획을 보고 네가 가질 생각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영어 공부는 보나마나 작심 삼일이고 기술 서적은 그럭저럭 보겠구나~ 자슥~’

나도 너처럼 생각했다. 기술 서적은 그럭저럭 보겠지만 영어 공부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 영어 공부가 의외로 그럭저럭 되고 있다. 이유는 내 아득한 뼈속까지 영어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최근 영어 문서를 봐야 해결 가능한 프로그램들을 다루면서 영어 잘 모르는 내가 그야말로 바보 같았다. 바보라고 생각하니 내가 정신 번쩍 차리면서 영어 공부는 그럭저럭 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하게 기술 서적 보기에서 튀어나왔다. 전철 안이 책읽기에 불편하긴 하지만 기술서적이 통~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멍하니 5페이지 정도 읽다가 ‘내가 뭘읽었지?~ 무엇을 배웠지?~’ 라고 자문하면 하나도 떠오르는게 없어서 어이없이 책읽기를 초기화/원복/리셋하여 최초 읽었던 페이지부터 다시 읽는다. 그래도 읽히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익숙한 대중가요 들을 때 뇌에서 아무 반응없이 흘려 보내는 것처럼 단어들은 흘려 보내지고, 우리들 이해하라고 만든 문장은 ‘너는 이것도 모르지~’ 라고 약을 올리고 있다.

책이 읽히지 않은 이유를 가만히 따져 보니 이 책은 이해하기 힘든 번역책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이해하기 힘든 번역책은 마치 괴짜 개발자가 굉장히 멋진 기능을 구현하긴 했는데, 그 내부는 아무도 알아볼수 없는 자기만의 복잡한 세계로 프로그램 짠 것과 비슷하다. 이런 괴짜 개발자는 옛날에는 천재 개발자로 인정받았겠지만 요즘 유지보수를 우선으로 치는 분위기에서는 당장 짤라야 된다.

번역 기술 서적의 화려한 광고를 볼 때 이 책만 알면 절정의 고수가 될 것 같아서 혹해서 사는데, 사실 훌륭한 책일수도 있지만 내가 산 번역책중 몇 가지 책은 버려졌다.

누구 말마따나 원서를 보는게 차라리 날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관심 갖는 기술에서 그나마 번역된 책이 이것뿐이어서 계속 보고 있다.

서비스는 필요에 의해 생겨나는 법, 갑자기 이런 서비스가 생각나기도 한다. ‘번역책을 매끄럽게 다듬어주는 번역책 다듬기 서비스’ 이런 서비스가 진짜 생겨난다면 내가 한번 도전하고 싶다. 다만 맞춤법을 더 공부해야겠다.

오늘은 내가 읽은 기술 서적을 계속 초기화/원복/리셋 하다가, 결국 포기하며 챕터를 건너뛰곤 했다.

내가 공부하는 이 기술분야를 너는 원서로 보고 있다고 하니, 너는 저만큼 앞서가고 있는것 같다.

집에가는 전철길 번역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영어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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